故 강대원 박사..

[Why] 이 한국인이 없었다면 아이폰도 아이패드도 없었다

 

1992년 사망한 故 강대원 박사
1960년 개발한 모스펫반도체가 소형 컴퓨터 제작의 기반 돼
플래시메모리의 기초도 만들어… 美선 에디슨급, 한국에선 홀대

애플이 휴대용 소형 컴퓨터인 태블릿PC '아이패드'를 출시한 지 80일 만에 300만대 판매를 기록했다. 본지 6월 24일

한국 IT 산업이 애플 열풍에 주춤하고 있다는 우려는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MP3 플레이어를 세계 최초로 만든 한국엔 한때 수십개에 달하는 제조업체가 있었지만, 애플 아이팟 등장 이후 씨가 말랐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이 한 명만 있었어도 한국의 IT 위상이 흔들리진 않을 것"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다. 그런데 한 한국인 과학자가 없었다면 아이팟·아이폰·아이패드도 있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가 1992년 61세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동맥류 파열로 미국에서 사망한 고(故) 강대원 박사다. 강 박사는 전 세계 전자공학자들이 공부하는 교과서와 반도체 관련 논문에 빠짐없이 인용되는 과학자다.

그가 1960년 미(美) 벨연구소 연구원 시절 세계 최초로 개발한 모스펫(MOSFET) 반도체는 진공관→트랜지스터→집적회로(IC)의 진화에 이은 것이다. 표면에 절연층과 금속 전극을 만들어 전력 소비를 크게 줄였다.

강 박사가 만든 반도체는 집채만 한 컴퓨터를 A4 용지만 한 크기로 줄일 수 있게 된 계기가 됐다. 강 박사가 모스펫을 개발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PC를 비롯해 휴대폰, 디지털카메라 등 거의 모든 IT기기가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트랜지스터를 개발한 연구진과 IC를 개발한 사람은 차례로 노벨 물리학상을 탔다. 강 박사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그들에 이어 노벨상을 탔을 것이 확실시된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7년 뒤인 1967년 강 박사는 또다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전원을 꺼도 저장된 데이터가 사라지지 않는 비휘발성 반도체 기억장치를 개발한 것이다. 오늘날 보편화된 플래시 메모리의 기초다.

이처럼 반도체로 만든 기억장치가 대세로 자리잡으면서 소니 워크맨 등 테이프형 휴대 녹음기와 필름 카메라는 종말을 맞았다. 한국이 반도체 시장에서 일본을 제친 것도 따지고 보면 강 박사의 연구성과를 발 빠르게 활용했기 때문이다.

애플 아이패드 핵심부품 중에 강대원 박사 덕을 보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 디지털카메라와 노트북의 메모리카드도 마찬가지다. 강 박사가 없었다면 오늘의 스티브 잡스가 나올 수 있었을까. / AP연합
인류를 디지털 사회로 성큼 다가서게 한 그를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은 그가 미국에서 주로 살았기 때문이다. 1931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경기고를 거쳐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수재였다.

6·25전쟁 때 해병대에서 복무한 뒤 1955년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석사와 박사를 땄다. 당시 세계 최고였던 벨연구소에 연구원으로 들어가 29세에 모스펫을 개발해 32세 때 특허를 냈다.

30년 가까이 벨연구소에 몸담은 그는 고국의 지인들과 교류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미국으로 떠난 탓에 그와 깊은 인연이 있는 인사도 드물었다. 고국에선 그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지만 미국에서의 명성은 대단했다.

한국인 최초로 국제전기전자기술인협회(IEEE)와 벨연구소 펠로를 지냈고 오하이오 대학의 '탁월한 졸업생상'을 탔다. 과학자들 사이에서 최고의 영예로 꼽히는 프랭클린 인스티튜트의 스튜어트 발랜틴 메달도 수상했다.

작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에디슨, 벨, 라이트 형제, 노벨 같은 발명가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미국 특허청은 IC 개발 50주년을 기념해 연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강 박사의 모스펫 개발로 반도체 산업이 지금같은 규모의 시장으로 발전하게 됐다!" 한국에선 강 박사를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미흡하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성장을 기리기 위해 재작년에 처음 마련한 '반도체의 날'기념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강 박사는 1988년 벨연구소를 떠난 뒤 컴퓨터와 통신기술 기초연구를 위해 만든 NEC 연구소의 초대 소장을 맡았다. 이후 전자공학 학회지 등을 통해 앞선 기술과 학문을 국내에도 소개했고 관련 기업에 조언도 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력이 국내 반도체 업계의 외면을 당한 원인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그와 인연을 맺었던 회사들이 현재 세계 최강으로 꼽히는 국내 굴지의 회사와 경쟁관계였던 점 때문에 홀대받고 있다는 것이다.

by kkuli | 2010/07/03 09:45 | 3.뉴스.. | 트랙백 | 덧글(0)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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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 스치듯 지나가는 차량과 사람들이 모습이 너무나 낯설기만하다..
240일간의 시간이 내게 너무도 많은 망설임과 신중함을 가르친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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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없이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그렇게..
나를 향한 불신과 좌절을 맞이하고.. 
맞서 나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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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잦아드는것 같다..
어디에든 나가서 커피 한 잔 마시는게 좋을것만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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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kuli | 2010/04/02 08:46 | 1.하루.. | 트랙백 | 덧글(0)

역사가 우리에게 무자비한 교사(敎師)라는 사실..p.12~p.23..




체제는 기아와 공포를 증대 시키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부는 점점 집중되고 빈곤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제적인 전문기관의 문서도 인정하고 있는 바로,
그 무균법적(無菌法的)인 용어법에서는 우리의 억압받고 있는 지역을 '개발도상국'이라 부르고,
노동자계급의 치유하기 어려운 빈곤화를 '퇴행적(退行的)소득 재분배'라고 일컫고 있다.
국제적인 메커니즘은 계속 기능하고 있다.
즉 상품을 공급하는 국가들과 물자를 공급하는 사람들이 의연히 존재하고 있다.
p.12..

 


선진국들이 자기 제품의 가격을 인상하기 전에 일찍이 한 번이라도 누구와 상의한 적이 있을까.
30년전부터 석유 가격은 계속 내리기만 했다.
그 너무나도 낮은 시장가격은 세계의 대공업 중추국에 대한 거액의 보조금을 의미했지만
대공업 중추국의 제품은 계속적인 가격인상을 기록했다.
미국과 유럽 제품의 부단한 가격인상과는 대조적으로 새로운 석유가격은
그것을 1952년의 수준으로 되돌렸을 뿐이다.
1973년에 이르러 겨우 석유는 그 20년 전의 구매력을 회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p.13..

 


1977년을 보내고 1978년을 맞이 할때 쿠바에서는 민중이 축제를 개최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 19주년이 되고 있있던 것이다.
그 며칠 후 니카라과에서는 격노한 대중이 거리로 우르르 몰려 나왔다.
독재자 소모사의 아들은 열쇠 구멍으로 바깥을 엿보고 있었다.
몇몇 기업이 격노한 민중에 의해 불태워졌다.
그 기업 중 하나인 플라스마펠레시스는 흡혈(吸血)을 전문으로 하고 있었다.
1978년초에 불태워진 이 회사는 쿠바인 망명자의 기업으로 미국을 상대로 니카라과인의 혈액을
판매하는 것을 주업무로 하고 있었다.
(혈액의 상행위에서는 다른 상행위에서 그러하듯이 생산자가 받는 것은 팁 정도에 불과하다.
예컨데 헤모 캘리비언 회사는 아이티인의 피 1리터에 대해서 3달러 밖에 지불하지 않지만 미국 시장에서는 그것을 25달러에 팔고 있다.)
p.16..

 

 

라바피에스(발을 씻어 주는 사람)..
아이티는 서반구(西半球)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이다.
거기에는 구두닦이 보다도 라바피에스(발을 씻어주는 사람) 쪽이 더 많다.
라바피에스란 동전 한 닢을 받고 닦아야 할 구두를 갖지 못한 채 맨발로 다니는 손님의 발을
씻어주는 어린이를 말한다.
아이티인의 평균 수명은 30세 안밖이다. 10명의 아이티인 중 9명은 글을 읽지 쓰지 못한다.
메마른 산의 경사면에서 국내 소비용 작물이 경작되고 있다. 비옥한 분지(盆地)는 수출용 작물에 이용되고 있다.
즉 가장 좋은 토지는 커피,설탕,카카오,그 밖의 미국 시장이 요구하는 작물의 생산에 충당되고 있다.
아이티에서는 야구를 하는 사람은 없지만 아이티는 세계에서 주요한 야구공 생산국이다.
하루에 1달러를 받고 아이들이 카세트나 전자부품을 조립하고 있는 공장이 다수 존재한다.
물론 이익도 테러 집행인들의 몫을 뺀뒤에 수출된다.
아이티에서는 항의의 의지를 아주 조금이라도 나타내면 투옥이나 죽음을 면치 못한다.
실로 믿기 어렵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본래부터 대단히 낮은 아이티 노동자의 임금이
71년에서 75년까지의 기간에 실질소득면에서 4분의 1로 감소했다.
의미심장하게도 그 기간에 이 나라로의 미국 자본의 새로운 유입이 시작되었다.
p.23..


 

by kkuli | 2009/06/02 15:09 | 5.수탈된 대지.. | 트랙백 | 덧글(0)

생명은..






그렇게 생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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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삶을 향한 작은 호흡이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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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고 까만 점을 가진 이 녀석..
이 녀석 어미의 어릴적과 너무도 흡사한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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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생명..
그 생명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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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kuli | 2009/05/31 20:49 | 1.하루.. | 트랙백 | 덧글(0)

노무현 추모곡 'we beli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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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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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슬픔속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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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의 음성을 듣고, 그의 체온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한 현실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오늘 우리들의 삶속에서 그의 음성과 체온을 찾고자하는 노력을 중단하여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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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의 통탄할 죽음을 오늘로 인정하되, 결코 내일로 인정하여서는 안된다..
그것만이..
하나의 힘으로 싸우다 죽어간 고노무현 전대통령..
그의 죽음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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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그 거대한 두려움 앞에서 고뇌하였을 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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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과 죄스러움 앞에 고개를 숙이지만..
가슴 한 곳에 뜨거운 심장의 살아있음을 각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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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무너뜨린 권력자들..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민중이 이 나라의 주인이며,
자신들의 탐욕을 완전히 버려내지 못하는한 그 어떤 화해와 용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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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규명하여..
화창한 5월의 어느날..
작은 비석 앞에서 무릅꾾고 술 한잔 나눌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
..
그렇게 이 나라에 청명한 5월이 오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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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kuli | 2009/05/30 15:54 | 1.하루.. | 트랙백 | 덧글(0)

방상훈 대저택과 봉하마을 사저..




[노무현 서거-6] <조선일보> 방상훈 대저택과 봉하마을 사저

요즘 내 생각들2009/05/27 17:08 정운현

부엉이 바위에서 바라본 봉하마을 사저 전경(출처-오마이뉴스)


당신이 떠난 후 연일 언론에 등장하는 '두 곳'이 있습니다.
당신이 몸을 던진 부엉이 바위와 또 하나는 ‘사저’입니다.
저도 지난 2월 부산 출장 갔다가 오는 길에 봉하마을에 들러서 사저를 봤습니다.
사저 뒤로는 산이 있고, 앞에는 김해시로 나가는 도로가 나 있더군요.
시골마을의 집 치고는 큰 편이었지만, 그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번에 봉하마을 현지를 방문한 분들은 당신의 사저를 보고서
아마 조금 의아하게 생각한 분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그리고 한나라당에서 그간 뭐라고 했습니까?
아방궁, 노무현 타운, 심지어 노방궁(노무현+아방궁)이라고 떠들어 댔죠?
이것 하나만 봐도 조-동은 나쁜 언론, 한나라당은 나쁜 정당입니다.

<조선일보>는 당신이 퇴임하기 반년 전인 2007년 9월 10일자 사설('노무현 타운')에서 이리 썼습니다.

"대통령이 퇴임 후 고향에 내려가겠다고 했을 때 서울에 사는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 비교해 신선한 느낌을 받은 국민이 적지 않았는데 지방에서 소탈하게 사는 전직 대통령 모습을 떠올렸던 국민들은 1만평이나 되는 ´노무현 타운´이 등장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동아일보>는 한 달여 뒤인 2007년 10월 15일자 <이재호 칼럼>(‘
盧대통령, 解官을 아시나요’)에서 이렇게 썼더군요,

“경남 김해 봉하마을의 ‘노무현 타운’도 그렇다. 역대 대통령 사저(私邸) 중 가장 큰 사저가 수백 평이 넘는 터에 세워지고 있다. 다산이 말한 ‘고향으로 가는 낡은 수레와 야윈 말’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언제나 사회적 약자의 편임을 자임해 온 정권에서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봉하마을 사저 주변 배치도(출처-동아일보, 07.10.11)

이보다 나흘 앞서 <동아일보> 강정훈 기자가 봉하마을 사저 공사현장을 현지취재한 기사(10월 11일자)에 따르면, “3991m² 터에 지어지는 노 대통령의 사저는 지하 1층, 지상 1층의 주택으로 건물 연면적은 933m²다. 청와대가 밝힌 공사비는 9억5000만원”이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봉하마을 사저는 강정훈 기자가 쓴 그대로입니다. 당신이 퇴임 후 고향에 돌아가 고향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 고향 옛 집 인근의 대지 3991m²(약 1300평)을 사비로 사서 지상1층, 지하 1층 건물을 지었습니다. 구입 당시 땅값은 평당 15만원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땅값, 공사비를 합쳐 총 12억원이 들었는데, 이 중 6억원은 대출을 받았구요. 강남의 웬만한 아파트 30평만 돼도 10억이 넘는데, 그에 비하면 그리 ‘호화’까지는 아닌 셈이죠.

그런데 이런 당신의 사저가 왜 ‘아방궁’이라고 소문났습니까?
혹 실내를 ‘아방궁’처럼 꾸며 놨나요?
권 여사님, 언제 한번 공개해버리시죠.

지난해 10월 ‘쌀 직불금’ 문제가 터졌을 때의 일입니다.
한나라당이 당신의 사저를 두고 아방궁, 심지어 노방궁이라고도 하더군요.

작년 10월 14일 당시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열린 국정감사 점검회의에서 "(사저 뒷산을) 웰빙숲 조성은 쌀 직불금 파동에 버금가는 혈세 낭비의 대표적 사례"라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 집 앞에는 주차할 데도 없다. 노 전 대통령처럼 아방궁을 지어서 사는 사람은 없다"(매일경제, 08. 10. 14)고 열을 올렸습니다.

그 다음날은 대변인까지 나섰더군요. 한나라당 조윤선 대변인은 “노 전 대통령의 사저와 뒤편 산을 웰빙 숲으로 가꾸는 데 530억 원 가까운 혈세를 써 그야말로 ‘노방궁(노무현 아방궁)’을 만들었다. 서민 생활은 점점 피폐해지는데 그의 주변은 왜 풍요해졌는지 (국감 과정에서) 밝혀져야 한다”고 또 열을 올렸습니다.

정치인들 얘기야 반은 남 헐뜯는 얘기니 그렇다고 쳐도 자칭 ‘1등신문’이라는 신문들까지 나서서 작문을 해서는 안되죠. 특히 ‘서울에 사는 전직 대통령들’과 ‘시골로 내려간 당신’을 맞비교해가면서 ‘청빈하게 살줄 알았더니 그럴 줄 몰랐다’는 식은 말이 안 되는 얘기죠.

요즘 기성언론의 보도가 신뢰성을 상실해가고 있는 반면, 블로그가 뜨고 있는 데요,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정확한 보도는 물론 할 얘기를 가감 없이 하기 때문입니다. 몇몇 파워블로거들은 이미 신문, 방송사 소속 기자 부럽잖습니다. 그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중앙일보> 편집부 기자인 노태운 씨입니다. 그는 ‘노태운의 발가는대로’라는 블로그를 운영중입니다.


공사중인 봉하마을 사저 전경


이 노태운 기자가 작년 10월 15일자로 자신의 블로그에 ‘상도동 봉하마을 땅값-집값 비교해보니’라는 글을 포스팅했습디다. 노 기자는 도면, 공시지가표 등을 토대로 하여 객관적으로 분석했는데, 이 글엔 이념도 정파도 없습니다. 팩트, 즉 ‘사실’만 있을 뿐입니다. 노 기자의 포스팅 일부를 옮겨 보면,

“1998년 초 소유권보존 등기를 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 사저는 2층(지하 1층, 옥탑)으로 연면적은 340.94평방미터(약 103평)입니다.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철근콘크리트조 경사지붕 2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 사저는 1층(지하 1층)으로 지어졌는데, 연면적은 803.05평방미터(약 243평, 경호시설은 제외)입니다. 노 전 대통령 사저 넓이가 2배 이상 큽니다.

국토해양부가 운영하는 '토지이용규제정보서비스' 사이트에 들어가면 땅의 지목과 면적이 나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상도동 사저의 땅은 면적이 337평방미터(약 102평)으로 대지입니다. 반면 노무현 전 대통령 봉하마을 사저의 땅은 면적이 3991평방미터(약 1209평)으로 지목은 역시 대지입니다. 노 전 대통령의 대지가 11.8배나 넓습니다.

하지만 땅값은 반대입니다. 한국토지정보시스템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의 상도동 사저 대지의 올해(2008년) 공시지가는 1평방미터에 215만원입니다. 면적이 337평방미터이니 총 공시지가는 7억2455만원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봉하마을 사저 땅의 올해 공시지가는 1평방미터에 12만9000원입니다. 이 땅의 지난해 공시지가는 1평방미터에 2640원이었습니다. 원래 임야였던 땅이 올해 대지로 바뀌었기 때문에 가치가 49배 뛴 것이죠. 3991평방미터 총 공시지가는 5억1483만9000원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 사저 땅은 크기는 노 전 대통령의 10분의 1도 안되지만 가치는 2억원 이상 비싸게 평가되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 사저의 올해 1월 1일 현재 공시가격은 6억9900만원입니다. 지난해와 똑같습니다. 올해 신축된 노무현 전 대통령 봉하마을 사저의 올 공시가격은 지난달 말 공시되었습니다. 올해 6월1일 현재 6억500만원입니다.”

노 기자 글, 똑 떨어지죠? 어느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보셨습니까? 그건 그렇고 노 기자의 포스팅을 간단히 요약하면, 봉하마을 사저는 YS의 상도동 집과 비교할 때 대지 넓이는 10배가 넘지만, 땅값이나 집값은 YS집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거야 ‘서울 상도동’과 ‘김해 봉하마을’을 비교하니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런데 이걸 두고 한나라당이나 조선-동아에서 대규모 호화저택인 것처럼 떠들어댔다니 참으로 놀랠 노짭니다.

서울 흑석동 소재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의 대저택. 길가에서부터 정면으로 보이는 산 전체가 이 집 땅이다.


위성사진으로 본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대저택. 가운데 숲으로 둘러싸인 부분이 방 사장 저택이다.


옛말에, ‘남의 눈의 티끌은 보여도 제 눈의 들보는 못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선일보>가 꼭 그 짝입니다.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은 서울 흑석동에 그야말로 ‘대저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년 국세청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집’을 발표하는 데, 방상훈 사장은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에 이어 몇 년째 ‘2등’ 자리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그야말로 '아방궁'이라고 할만도 한데, 방씨 집안은 신문 팔아서 어찌 그리 큰돈을 벌었는지 모르겠습니다. (* 동아일보 사주의 집은 조사해서 다음 기회에 알려드리겠습니다)

한 자료에 따르면, 방상훈 사장이 소유한 흑석동 대저택은 ‘건평 221평, 대지1539평, 임야 2209평, 전체 3748평’으로, 2007년 공시지가 기준으로 86억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참고로 봉하마을 사저건축에 사용된 경비는 대지매입비 1억9455만원, 설계비 6500만원, 건축비 9억5000만원 등 총 12억1000만원으로, 모두 노무현 개인재산으로 부담한 것입니다.) 방 사장의 흑석동 대저택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산 속에 있어서 겉보기에는 산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네티즌은 이를 두고 “산이 아니고 집입니다”라고 확인해주기도 했습니다.

이 사저를 설계한 건축가 정기용 씨가 26일자 <한겨레>에 몇 자 기고를 했더군요. 사저 지을 때 조선, 동아 같은 부류의 신문들이 ‘봉화아방궁이라고 써대길래 기자회견을 통해 해명하겠다고 했더니 소용없는 일이니 그만두라고 하시더랍니다. 몇 줄 보시죠.

“봉하마을의 사저는 내가 설계했기 때문에 건축가인 내가 제일 잘 안다. 그런데 항간에서는 봉화아방궁이라는 말로 날조해서 사저를 비하하는 정도가 아니라 악의마저 엿보이게 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나는 대통령에게 내가 나서서 기자회견을 해야겠다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래봐야 아무소용이 없으니 참으라고 하셨다. 나중에 다 밝혀질 일이지만 내가 설계한 대통령의 사저는 재료로 말하자면 흙과 나무로 만든 집이다. 그리고 아방궁이 아니라 불편한 집이다.”

이제 이글을 마치면서 요약하겠습니다. 제가 듣기로, 봉하마을 사저는 지상 1층, 지하 1층에 방 3개, 욕실 1개, 거실 1개, 그리고 마당 등이 전부라고 합니다. 시골에서 이만하면 적지 않은 집인 건 맞습니다. 그렇지만 전직 대통령이 귀향하여 사는 집 치고는 ‘호화저택’이라고 비난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걸 두고 마치 한 평에 수 천만원씩 하는 서울땅에 지은 대저택인 양 보도하는 것은 참 우스운 짓이죠.

이제 그는 이 ‘사저’마저도 버리고 한 평 땅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의 비석 앞에서 사죄할 사람은 비단 이명박 대통령과 검찰만이 아닙니다.
일말의 양식이 있다면, 조선, 동아의 사주와 편집책임자들도 사죄해야할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저 앞에서 방문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는 모습(출처-노무현 공식홈페이지, 2008. 3.11)


* 방금 제 핸폰 문자로 서울광장이 드디어 개방돼 오늘 저녁 7시에 거기서 시민추모제가 열린다고 하네요. 디카와 물 한 병 들고 나가볼 참입니다.

** 방금 오마이뉴스에 가보았더니 정부에서 서울광장에서 시민추모제를 갖는 걸 '불허'하여 덕수궁 앞에서 열린답니다. 겁이 되게 나는 모양입니다. (18:30)


by kkuli | 2009/05/28 08:05 | 3.뉴스.. | 트랙백 | 덧글(0)

노무현 전대통령을 잃은 이광재 의원의 옥중서신..

 

다음은 이광재 의원이 보좌관을 통해 전한 글의 전문이다.

 


<꽃이 져도 그를 잊은 적이 없다>

 

좋은 나라 가세요.뒤돌아 보지 말고 그냥 가세요.

못다한 뜻가족丹心으로 모시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제대로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했습니다.

21년전 오월 이맘때쯤 만났습니다. 42살과 23살 좋은 시절에 만났습니다.
부족한게 많지만 같이 살자고 하셨지요.

‘사람사는 세상’ 만들자는 꿈만 가지고 없는 살림은 몸으로 때우고 용기있게 질풍노도 처럼 달렸습니다.불꽃처럼 살았습니다.

술 한잔 하시면 부르시던 노래를 불러봅니다.

“오늘의 이 고통 이 괴로움 한숨 섞인 미소로 지워버리고 가시밭길 험난해도 나는 갈테야 푸른 하늘 맑은 들을 찾아갈테야 오 자유여! 오 평화여! 뛰는 가슴도 뜨거운 피도 모두 터져 버릴 것 같아...“

터져 버릴 것 같습니다.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 어찌할지 모르겠습니다.

천형처럼 달라 붙는 고난도 값진 영광도 있었습니다.

운명의 순간마다 곁에 있던 저는 압니다. 보았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남자 일을 미치도록 좋아하는 사나이를 보았습니다.

또 하나의 모습 항상 경제적 어려움과 운명같은 외로움을 지고 있고 자존심은 한없이 강하지만 너무 솔직하고 여리고 눈물많은 고독한 남자도 보았습니다.
존경과 안쓰러움이 늘 함께 했었습니다.

“노 대통령이 불쌍하다”고 몇 번이나 운 적이 있습니다.

최근 연일 벼랑 끝으로 처참하게 내 몰리던 모습 원통합니다.

원망하지 말라는 말씀이 가슴을 칩니다.

잘 새기겠습니다.

힘드시거나 모진 일이 있으면계시는 곳을 향해 절함으로써 맛있는 시골 음식을 만나면 보내 드리는 것으로 어쩌다 편지로 밖에 못했습니다.

산나물을 보내 드려 달라고 부탁했었는데 애통합니다

지난 여름 휴가 때 모시고 다닐 때는행복했습니다.풀 썰매 타시는 모습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올 여름도 오신다고 했는데...

이 고비가 끝나면 제가 잘 모실 것이라고 마음속에 탑을 쌓고 또 쌓았습니다. 계획도 세웠습니다.

절통합니다.애통합니다. 꼭 좋은 나라 가셔야 합니다.

바르게, 열심히 사셨습니다. 이젠 ‘따뜻한 나라’에 가세요 이젠 ‘경계인’을 감싸주는 나라에 가세요 이젠 ‘주변인’이 서럽지 않은 나라에 가세요.

‘남기신 씨앗’들은, ‘사람사는 세상 종자’들은나무 열매처럼, 주신 것을 밑천으로 껍질을 뚫고 뿌리를 내려 ‘더불어 숲’을 이룰 것입니다

다람쥐가 먹고 남을 만큼 열매도 낳고,기름진 땅이 되도록 잎도 많이 생산할 것입니다.

좋은 나라 가세요. 저는 이세상을 떠나는 날까지닿는 곳마다 촛불 밝혀 기도하고, 맑은 기운이 있는 땅에 돌탑을 지을 것입니다. 좋은나라에서 행복하게 사시도록...돌탑을 쌓고, 또 쌓을 것입니다. 부디, 뒤돌아 보지 마시고 좋은 나라 가세요.

제 나이 44살

살아온 날의 절반의 시간 갈피갈피 쌓여진 사연 다 잊고 행복한 나라에 가시는 것만 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했습니다.

다포(茶布)에 새겨진 글“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가 떠오릅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주체 할 수 없는 눈물 밖에 없는 게 더 죄송합니다.

좋은 나라 가세요.

재산이 있던 없던 버림 받고 살지 않는 삶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유산은, 내 유산은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노대통령님으로부터 받은 유산,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저를 아시는 분들에게 봉하 마을에 힘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가족에게 따뜻한 마음 거듭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저를 아시는 분들제가 말하는 맑은 기운이 있는 땅, 탑을 쌓을 곳이 어디인지 아실 겁니다. 본격적으로 탑을 쌓고 지읍시다.

노대통령님 행복한 나라에 가시게기도해 주세요. 가족분들 힘내시게

찻집에서 본 茶布에 씌여진 글귀가 생각납니다.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

끝없이 눈물이 내립니다.

장마비처럼..
 

이광재 드림

 


 

by kkuli | 2009/05/26 10:01 | 2.post-it.. | 트랙백 | 덧글(0)

이명박의 정치보복이 노무현을 죽였다..




그의 자살은 '나로 끝내라'는 마지막 항거


바보, 그는 끝까지 바보였다.

 

봉하마을에 조문가는 길, KTX에 몸을 맡기고 한 일간지의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특집기사를 읽으며 되짚어본다. 누가 노무현을 죽였는가.

 

한 네티즌은 23일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청와대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이런 글을 올렸다.

 

"이명박 대통령님, 이제 평안하십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명박 대통령님, 이제 시원하십니까.

 


이명박 신임 대통령과 노무현 전임 대통령이 2008년 2월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열린 제 17대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뒤 연단을 내려오며 환호에 답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위선의 극치... 죽어서야 갖춰주는 전직대통령 예우

 

이명박의 정치보복이 결국 노무현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에 대해 "애석하고 비통한 일"이라고 말했다. 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어긋남이 없도록 정중하게 모시라"고 참모들에게 지시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애도를 표시하는 창을 만들었다.

 

죽어서야 예우를 갖춰준단다. 그런데 그나마 그 '죽어서 해주는 예우'도 청와대 대변인의 입 속에만 있다. 청와대 홈페이지의 팝업창에만 있다. 서울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풍경이 위선의 극치를 보여준다.

 

서거 소식이 전해진 23일 늦은 밤, 덕수궁 대한문 앞에 시민들이 마련해놓은 분향소에 아들 손을 잡고 가봤다. 경찰은 경찰버스 수십대를 동원해 그 분향소를 에워싸 시민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한 50대 남성이 눈물을 흘리며 정복을 입은 경찰지휘관에게 항의했다.

 

"이게 죽은 대통령에 대한 예의냐, 인간에 대한 예의냐."

 

그 경찰지휘관은 답했다.

 

"우리가 힘이 있습니까? 시키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경찰버스는 대한문 앞뿐만 아니라 시청앞 광장 전체도 뺑 돌려 막고 있었다. 시민을 차단한 시민의 광장 안에서는 경찰관 수십명이 널부러져 자고 있었다.

 

어느 대통령보다 시민과 함께 호흡하고자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고, 시민들은 추모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꽃을 들고 나왔건만, 이명박 정권은 죽은 노무현과 시민을 떼어놓기 위해 그렇게 야비한 짓을 하고 있었다. 이게 애도인가, 그게 예우인가?

 

검찰의 노무현 모욕주기, 이명박 대통령은 왜 안 말렸나

 

기회는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진정으로 평소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생각했다면, 그는 왜 검찰의 노무현 수사과정을 보고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을까?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의 가족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은 640만달러와 억대 명품시계 2개다. 그런데 그것의 대가성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검찰은 노무현의 정치적 생명을 끝내기 위해 갖은 모욕적 방법을 동원했다.

 

검찰은 조중동 등 보수언론과 방송에 연일 골고루 '특종거리'를 흘리면서 보도경쟁을 부추겼다. 오죽했으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동안 (검찰)조사과정에서 온 가족에 대해 매일같이 혐의가 언론에 흘러나와 그 긴장감과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신 것 같다"고 했을까.

 

검찰은 또 노 전 대통령이 거짓말을 한다는 전제로 대질신문을 거론했고, 소환 당일에는 자정을 넘겨가면서까지 수사를 했다. 그런 검찰의 행위들은 분명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가 아니었다. 모욕주기였다.

 

검찰의 현직 간부마저 "검찰 내부에서도 박 전 회장과 노 전 대통령의 오랜 후원 관계 때문에 일반적 뇌물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이 있었다"며 "그런데 일반 잡범 다루듯 그렇게 낱낱이 혐의를 드러내니 노 전 대통령의 자존심이 크게 상했을 것"(<한겨레>5월24일)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망신과 모욕을 당하고 있을 때, 이명박 대통령이, 이 정권의 법무장관이 검찰에 대해 어떤 문제제기를 했는지 국민은 알지 못한다. 즐기고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대다수의 국민은 노무현 수사의 총감독이 이명박 대통령일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검찰총장이 작심한다고 해서 이뤄질 수 있을까? 이명박 대통령의 승인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지극히 정치적인 사안이다. 노무현 수사의 목적은 노무현을 정치적으로 죽이는 것이었고, 그 총감독은 임채진 검찰총장이 아닌 이 대통령이었다고 보는 게 상식에 맞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애도를 한다?

 

이 대통령의 애도가 진심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잣대가 하나 있다. 그가 봉하마을에 직접 가서 조문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어떤 조문도, 애도 표현도 위선일 뿐이다. 이런 참회를 공개적으로 하기 전에는.

 

'죄송합니다. 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였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1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 선서를 마친 뒤 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가운데 노무현 전 대통령 내외가 박수를 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권우성




노무현의 자살은 '나로 끝내라'는 마지막 항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자살이 아니다. 마지막 항거였다. 그의 유서를 보라.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그의 측근들은 계속 검찰의 표적수사를 받을 것이다. 노무현의 자살은 '나로 끝내라'는 항거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에 의해 죽은 자들이, 죽어가고 있는 자들이 어찌 노무현과 친노 정치인뿐이겠는가.

 

용산참사는 이 정권이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보여줬다. 네티즌 미네르바를 구속한 것은 이 정권이 민주주의의 기본인 표현의 자유를 얼마나 과감히 죽이고 있는가를 보여줬다. 거듭된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에도 불구하고 최열 환경재단 대표를 기어이 구속하려 시도한 것은 이 정권이 시민단체 흠집내기에 얼마나 열을 올리고 있는가를 보여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황지우 총장을 끝내 몰아낸 것은, 정연주 KBS사장 몰아내기에서 시작한 진보개혁인사 솎아내기의 또 하나의 최근 사례다.

 

노무현 죽이기와 진보개혁세력 죽이기는 연결돼 있다. 참으로 통탄할 일은 10년 민주화정권에서 제자리를 잡은 것 같았던 국정원이 다시 살아나 백주에 정치권, 시민사회, 경제계에 개입을 하면서 그 죽이기에 가담하고 있다는 점이다.

 

누가 노무현을 죽었는가? 24일 오후 봉하마을에서 만난 조문객들도 그 질문들을 품고 있었다. 이날만 약 20만명이 다녀갔다. 이날 한때 소낙비가 30여 분간 쏟아졌는데도 조문대열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나는 그 일반 조문객들 사이에서 헌화를 위해 40분을 기다리면서 이런 말을 수없이 들었다.

 

"이명박이가 죽였어, 이명박이가..."

 

이명박의 선택, 다 죽일 것인가 더불어 살 것인가

 

서울로 오는 길, 밀양 역전의 한 식당에 들렀다. 마침 KBS 9시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한 조문객이 화면에서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슬펐는데 나중엔 화가 나더라."

 

그 방송을 보고 있던 40대 식당 주인이 혀를 차며 말했다.

 

"노 대통령하고 친하다고 다 잡아들이고 조사하고...... 남아나는 사람이 있어야지."

 

남아나는 사람이 있어야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진보개혁세력 씨말리기와 닿아있기 때문이다. 우린 씨말리기가 부른 비극의 제1막을 봤을 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음으로 이명박 대통령에게 경고한 셈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두 번의 진보개혁정권을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하는 한, 그것을 만들어낸 자부심으로 살아온 사람들을 포용하지 않고 씨말리기를 하는 한 '극단적 해법'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를 3년 이상 남겨두고 있지만, 이미 실패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는 전직 대통령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최악의 정치보복을 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오명을 남은 임기 동안 조금이라도 씻어내려면 국정기조를 전면 수정해야 한다. 진보개혁세력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쪽으로. 그 첫걸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전 앞에, 그 유가족 앞에, 국민 앞에 이렇게 참회하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였습니다.'

 

그것 없이는 이명박 대통령은 바보 노무현의 죽음에 슬픔이 분노로 변해가는 국민들과 임기 내내 제대로 화해하지 못할 것이다.



by kkuli | 2009/05/25 18:39 | 3.뉴스.. | 트랙백 | 덧글(0)

`가난의 끈 끊자` 다짐했던 그 바위서 `세상과 끈` 끊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를 승부라고 했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이런 정치관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승부사 노무현의 성적은 승리보다 패배가 많았다. 국회의원 선거, 부산시장 선거 등에서 네 번이나 낙선을 할 정도였다. 영남 출신으로 호남을 지역 기반으로 삼는 선택을 했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의 이런 오뚝이 정치는 가장 큰 승부인 2002년 대선에서 감동적인 드라마를 연출해냈다.

청문회 스타가 되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총선 때 부산 동구에 출마해 민정당 실세 허삼수 후보를 꺾으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당시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통일민주당의 공천을 받았다. 그를 YS와 연결했던 김광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재야 몫으로 남구를 제의받은 노무현이 ‘기왕이면 허삼수와 붙겠다’며 동구를 역제의해 왔다”고 말했다.

그해 11월 열린 5공 비리 청문회는 그가 전국적인 스타로 발돋움한 계기였다. 생중계 시청률이 50%를 넘나들었던 이 청문회에서 그는 장세동 전 안기부장, 안현태 전 청와대 경호실장, 정주영 현대 회장 등을 논리적이고 매서운 추궁으로 몰아세웠다. 그는 “내가 청문회에서 돋보인 것은 새 사실을 밝혀서가 아니라 증인들의 기를 꺾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정치인 노무현의 이미지를 결정지은 것은 89년 12월 광주 청문회 때였다. 그는 증인으로 출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광주에서 자위권 발동의 불가피성을 말하는 대목에서 자신의 명패를 집어던졌다. 청문회는 그 사건으로 끝나버렸다.

양 김과의 애증
90년 1월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과 YS, 김종필(JP) 신민주공화당 총재가 3당 합당을 선언했다. 그는 YS를 “변절자” “역사 의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며 ‘꼬마 민주당’에 남았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은 당시 김대중(DJ) 총재가 이끄는 평민당과의 야권 통합에 참여해 통합민주당의 대변인을 맡았지만 YS와 결별한 대가는 컸다. 허삼수 후보와 다시 맞붙은 92년 14대 총선에서 첫 고배를 마셨다. 4년 전 허씨를 “반란의 총잡이”이라고 했던 YS가 “충직한 군인”이라고 치켜세운 결과였다. 3년 뒤엔 부산시장 선거에 나섰다가 또 낙선했다.

노 전 대통령은 DJ와도 등을 졌다. 정계를 떠났던 DJ가 복귀하면서다. DJ가 15대 총선 직전인 95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그는 “신당 창당은 민의의 왜곡이며 보스 중심의 줄서기란 전근대적 정치행태를 답습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잔류했다. 15대 총선 때 서울 종로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나왔던 이명박 대통령과 맞붙었던 노 전 대통령은 “3김 청산”을 외쳤지만 양 김씨를 모두 등진 결과는 3등이었다. 연전연패를 겪으면서 대중 정치인으로서 그의 생명력은 끝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대통령에 대한 꿈을 품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97년 그가 김정길·이철 전 의원 등과 함께 ‘호구지책’ 차원에서 서울 강남에 ‘하로동선’이란 고깃집을 열었을 때다. 이강철 전 대통령 정무특보는 “DJ와 신한국당 후보가 대선에 나올 텐데 우리 국민통합추진위에선 당신(노무현)이 나가는 게 어떠냐고 권했더니 놀라면서도 ‘기분은 좋다’고 말하더라”고 전했다.

97년 신한국당을 탈당한 이인제가 대선 후보로 나오자 노 전 대통령은 한때 “나도 할 수 있다”며 대권 도전 의지를 밝혔지만, 결국 야권 통합을 명분으로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를 맡아 DJ 측에 재합류했다. 그는 DJ 밑에서 대권의 꿈을 구체적으로 키워 나갔다. 98년 모친의 삼우제를 지내기 위해 김해에 내려갔다가 고향 친구들이 “왜 호남당에 들어갔느냐”고 걱정하자 그는 “내가 대통령 후보가 되면 영남당 되는 거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바보 노무현’
노 전 대통령은 98년 종로 재·보선에 집권당인 국민회의 후보로 나서 7년 만에 국회로 돌아왔다. 하지만 2년 뒤 종로를 버리고 2000년 총선 때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했다. 지역주의 타파가 명분이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의 반대를 무릅쓴 승부수였지만 또 빗나갔다. 네 번째 패배였다. 하지만 반전의 드라마가 시작됐다. 3당 합당 거부, 부산 출마 등 무모해 보이는 ‘노무현 스타일’은 충성도 높은 매니어층을 형성한 것이다. ‘바보 노무현’이란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정치인 최초의 온라인 팬클럽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 결성된 것도 이때다.

DJ는 낙선한 노 전 대통령에게 2000년 8월 해양수산부 장관을 맡겼다. 노 전 대통령이 부산 출마 의지를 밝혔을 때 “노 의원, 나도 상고 나온 사람이야. 정치는 꿈을 갖고 도전하는 것이야”라고 격려했던 DJ였다.

드라마의 시작
2001년 9월 부산 지역 후원회에서 대선 도전 의사를 밝힌 뒤 10월 원외 최고위원에 당선된 그는 대권 후보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그 경선 통과 가능성을 점친 사람은 적었다. 1997년 대선 때 500만 표를 얻었던 이인제 의원의 벽은 높아 보였다. 당의 주류였던 동교동계도 이 의원과 가까웠다.

하지만 국내 정치 사상 처음으로 도입된 국민참여경선(2002년 3~4월)이 ‘노무현 주연’의 드라마를 만들었다. 그는 이인제 의원의 신한국당 경선 불복 전력을 물고 늘어지고 본선 경쟁력에 의구심을 제기하면서 영남후보론을 내세웠다. 광주에서부터 ‘노무현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노무현 바람’은 변화를 바라는 유권자들의 욕구와 맞물려 곧 태풍이 됐다. 출발점에선 이 의원 지지율이 두 배 이상 높았지만 경선의 승자는 노무현이었다.

하지만 경선 승리의 기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YS를 찾아가 그에게서 받은 시계까지 보여주며 허리를 굽힌 게 화근이었다. 여기에 DJ 아들을 포함한 비리 게이트가 정국을 강타했다. 노 전 대통령을 간판으로 내세워 치른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선은 민주당의 참패로 끝났다.

이 무렵 월드컵 붐을 타고 정몽준 의원이 대선 가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당내의 반 노무현 세력은 후보 교체를 요구하며 그를 끊임없이 흔들었다. 이들은 급기야 ‘후보단일화 협의회’를 결성해 줄지어 탈당했고, 이런 가운데 노 전 대통령의 당선 가능성을 점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은 또 한 번 도박을 걸었다. 그는 후보직을 내걸고 “TV토론과 국민경선을 통해 단일화를 하자”고 정 의원 측에 제안했다. 단일화 방식을 놓고 줄다리기가 벌어지자 그는 “정몽준 의원의 뜻대로 여론조사로 단일 후보를 결정하자”고 선수를 쳤다. 여론조사 설문 형태를 둘러싸고 협상이 교착되자 ‘이회창 후보에 대한 경쟁력’을 묻자는 정 의원 측의 요구까지 수용했다. 그렇게 물으면 노 전 대통령보다 정 의원이 더 유리할 것이란 게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관측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승부수는 적중했다. 여론조사 승부에서 그는 정 의원을 누르고 여권의 단일 후보로 선출된 것이다. 단일화의 여세를 몰아 노 전 대통령은 마침내 앞선 5년 동안 ‘여의도 대통령’이라 불리며 정국을 지배해 온 ‘이회창 대세론’마저 깨뜨렸다. 2002년 12월 19일 그는 16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201만4277표(48.9%). 역대 대선 사상 최다 득표였다. 이날 밤 노 전 대통령은 “대화와 타협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겠다”는 일성으로 ‘노무현 시대’의 개막을 선언했다.

“유년 시절의 내 기억에서 봉화산과 자왕골은 빼놓을 수 없는 무대다. 나는 그곳에서 칡을 캐고, 진달래도 따고, 바위를 타기도 했다. 풀 먹이러 소를 끌고 나오는 곳도 항상 그 골짜기였다.” (자서전 『여보 나 좀 도와줘』167쪽)
봉화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삶과 어린 시절 꿈이 시작된 곳을 세상과의 이별 장소로 택했다. 윤회를 믿었음일까.

가난의 그늘
광복 이듬해인 1946년 9월 1일(음력 8월 6일). 노 전 대통령은 경남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노판석(盧判石)씨와 이순례(李順禮)씨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까마귀도 먹을 것이 없어 울고 돌아간다’고 할 정도로 가난한 마을이었고 작은 과수원을 하는 그의 집안도 가난했다. 대창초등학교 학적부에는 ‘소농(小農)으로 생활수준은 하류(下流)’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어린 시절 노 전 대통령은 ‘공부 잘하고 말 잘하지만 자주 우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2학년 담임인 김정옥 교사는 생활기록부에 “각 과목 우수하고 성격도 활발하나 잘 운다”고 썼다. 중학시절 교사들의 평가란에는 ‘두뇌 명철, 성적 우수, 지도력, 진취성, 자주성, 정의감’ 등의 긍정적 표현 뒤엔 ‘비협조적ㆍ독선적ㆍ불안’ 등의 그늘진 평가도 뒤따랐다.

그만큼 ‘인간 노무현’의 성장 과정에 드리운 가난의 그림자는 짙었다. 대창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 시절 그는 항상 성적이 1, 2등을 다툴 정도였지만 학교를 못 가는 날이 많았다. 몸이 허약한 탓도 있었지만 ‘가사조력(家事助力ㆍ집안일 돕기)’ 등이 이유인 날도 많았다.

“나만 가난했던 것도 아닌데 어린 시절의 나는 유독 가난을 심각히 여기며 자랐다. 그리고 그 상처는 나의 잠재의식 속에 어떻게 해서라도 나만은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열망과 함께 모두가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동시에 심어졌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누나 영옥씨의 기억도 본인의 기억을 뒷받침한다. 6학년 때 일기장엔 “초가집이 변해 기와집도 될 수 있고, 흙 담장이 변해 벽돌담이 될 수 있다. 이뤄내고야 말겠다” “내가 크면 전 인류의 등불이 될 것이다. 아니 그것이 안 될지라도 단 10명의 등불이 될 것이다. 그게 안 되면 한 명이라도…”란 구절이 있다는 게 영옥씨의 기억이다.
가난의 편린들은 중학교 1년 휴학, 은행원을 목표로 한 부산상고 진학, 야간 경비로 일하며 학교에서 먹고 자던 부산상고 재학시절, 고교 졸업 뒤 농협 입사시험 낙방 등으로 이어졌다.

운명과의 승부
스무 살. 사법고시 도전은 가난 탈출의 승부수였다. 66년의 일이다. 고향마을 산기슭에 황토로 벽을 발라 직접 집을 짓고 고시 공부에 매달렸다. 한학을 한 부친 판석씨는 이 집에 마옥당(磨玉堂ㆍ옥을 가는 집)이란 이름을 붙여줬다. 어머니 순례씨는 ‘천상신장(天上神將)’의 위패와 관음상을 모신 제대(祭臺)를 만들어 치성을 드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75년 제17회 사법고시에 합격하기까지는 9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책값을 벌기 위해 울산의 한국비료 공장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고 군대도 다녀왔다.

부인 권양숙 여사와 연애를 시작한 건 제대 후였다. 같은 마을 출신인 권 여사는 낮엔 럭키(LG그룹의 모회사)에 나가 돈을 벌면서 밤엔 계성여상을 다니고 있었다. 양가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8개월간의 구애 끝에 노 전 대통령은 73년 1월 권 여사와 결혼했다. 태중엔 이미 장남 건호씨가 있었다.

같은 해 5월 정신적 지주였던 큰형 영현씨가 교통사고로 죽는 충격과 가장으로서의 부담 등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 그는 두 차례 연거푸 사법시험에 낙방했다. 당시의 부담감을 그는 훗날 “응시조차 포기하고 싶은 것을 부모님의 시선이 두려워 마지못해 상경했으나 시험 첫날부터 가슴이 답답하고 목구멍에 무엇이 치밀어 올라 우유와 계란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그래도 기를 쓰고 책을 볼라치면 몸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고 털어놨다.

애써 시작한 판사생활을 노 전 대통령은 7개월 만에 그만뒀다. ‘변호사 노무현’은 주로 등기업무ㆍ조세ㆍ회계 사건 등을 맡으며 돈을 벌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경제적인 삶의 질 향상이었던 것 같다. 스스로도 “판ㆍ검사, 변호사가 되면 시골에 별장도 하나 갖고 모양 나게 산다는 게 우리 부부의 꿈이었다”고 말했다. 가난 탈출 목표엔 성공했다. 사건 수임엔 부산상고 인맥이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후회스러운 일도 적지 않았다. 변호사를 개업한 직후 한 아주머니가 남편이 사기 혐의로 구속됐다며 변호를 의뢰해왔다. 노 전 대통령은 60만원에 사건을 수임했다. 한데 그 아주머니는 남편이 합의를 봤다며 해약을 요구했다. 노 전 대통령은 사정이 급해 받은 돈을 이미 써버린 뒤였다. 돌려달라, 안 된다 승강이를 벌이던 끝에 그 아주머니는 “변호사는 그렇게 해서 먹고 삽니까”라며 눈물을 흘린 채 돌아갔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나중에 자서전 머리말에서 “지금까지 걸어온 내 삶의 영욕과 진실을 담보로 해 백발의 할머니가 됐을 그 아주머니에게 따뜻한 용서를 받고 싶다”고 부끄러워했다.

세상에 눈 뜨다
노 전 대통령이 세상을 향해 눈을 뜬 건 당시 부산 재야의 좌장격인 김광일 변호사의 요청으로 81년 ‘부림사건’ 변론을 맡으면서다. 부산의 운동권 30여 명이 이른바 ‘좌경학습’을 하다 검거된 사건이었다. 처음 맡은 시국사건 변론이었다. 그는 학생들이 고문당한 상처를 직접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온몸에 시퍼런 멍자국이 남아 있었고, 변호사인 나조차 믿지 못해 공포에 질린 눈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고 술회했다. 72년 10월유신 때도 “헌법 책을 새로 사서 헌법 공부를 다시 해야겠구나” 했고, 79년 부마항쟁 때 동료 변호사들이 영장도 없이 잡혀갔다는 소식도 외면했던 그의 의식이 깨던 순간이었다.

이후 학생 운동권과 접촉하며 그는 생업을 팽개치다시피했다. 변호사 사무실은 문재인 변호사에게 맡겼다. 문 변호사는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문 변호사는 그 시절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을 2002년 이렇게 회고했었다. “85년 5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창립대회를 경찰이 원천봉쇄했다. 노무현은 아예 길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는 85년부터 민중적 삶을 살겠다면서 승용차를 놔두고 버스를 타고 다니며 부민동 사무실 앞에서 돼지국밥을 먹었다. 학생운동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학생운동 초기의 열정을 보여준 게 아닌가 한다. 나도 학생운동 출신이지만 사회에 나가면 점차 열정이 식는 게 보통인데 노무현은 반대였다.”

87년 대우조선 이석규씨가 시위 도중 최루탄을 가슴에 맞고 사망하자 노 전 대통령은 거제도에 들어갔다가 제3자 개입 및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21일 만에 적부심에서 풀려났지만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인권변호사’ 노무현의 명성이 퍼진 계기였다.





by kkuli | 2009/05/25 13:17 | 3.뉴스.. | 트랙백 | 덧글(0)

무등산이 내려앉고 있다..


무등산이 내려앉고 있다 [2009.05.22 제761호]
[표지이야기] 소설가 서해성, 항쟁 29주년의 광주를 걷다…
민주화의 메카였던 광장은 지금 텅 비어 있네



남도의 아버지 산, 무등산이 낮아지고 있다.

사람들은 오래도록 이 산에서 세상을 구할 불씨를 얻고자 했다. 산신령 따위 인격신을 향한 구복이 아니라 생동하는 역사에 비손해 천하를 도모코자 했다. 편지 끝이나 책머리에 ‘무등산 밑에서’라고 붙이는 일은 허세로 내뱉는 책상물림들 문자향이 아니라 시대와 양심의 명령에 따라 살겠다는 준엄한 다짐이었다. 그 중심에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자리잡고 있다. 지난 주말 무등산은 29년을 맞은 ‘광주’를 바라보면서 실록 짙은 등을 드러낸 채 구물거리고 있었다.

» 광주 도청 앞 분수는 29년 전에도 지금도 무심히 솟구고 있지만, 29년 전의 상처는 지금도 되살아나고 있다. 1980년 학살의 피로 물들었던 도청 앞에선 20년 뒤 로케트전기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농성을 하고 있다. 5·18 관련 단체 회원들이 눈앞의 이익 때문에 거친 몸싸움을 벌였던 곳도 도청 앞 광장이다.

‘무등산 밑에서’에 담았던 뜻

“갑오년에 이어 소작쟁의 등 농민을 중심으로 한 집요한 호남인 저항은 일제를 넌더리나게 했다. 한국전쟁은 이념적으로 전라도를 다그쳤다. 결정타는 박정희 정권이 날렸다. 거기에다 전두환이 실탄을 퍼부어댄 것이다.”

박광서 전남대 교수는 거침없이 논지를 펴나가면서도 처음 남도 사람들 정서에 적응하는 데 제법 시간과 공이 들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경기도와 서울에서 장성해 광주에 와 30년 넘게 산 그는 손아래 누이 박광숙을 김남주 시인과 혼인시켰다.

“4·29 재보선 때 이 지역 지방의회 보궐선거에서 민노당 후보 2명을 당선시킨 건 민주당에 좋게 한 방 먹인 격이다. 그렇다고 민주당이 달라질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이곳에서 완패하고 경기도에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사이익을 얻은 걸로 승리를 연호하는 걸 보면서 경악했다. DJ 이후 이들은 지도력에서도, 이념 지향성에서도 보수세력과 크게 다를 게 없다.”

똥 막대기를 꽂아도 되는 판에 성찰을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무망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해발 1200m에 조금 못 미치는 무등산을 누군가 갉아먹어왔다. 적어도 동학농민항쟁 이후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트라우마는 남도 정서란 이름으로 피학적 동질성을 부여하면서 정치세력에게 갈취당하기 좋은 먹이가 되었다. 독재세력에게는 분열 기제로, 호남 권력에는 기득권 유지의 볼모로 작동했다. 그걸 뿌리치고 스스로 주인이고자 한 게 5월 광주였다.

1980~90년대 숱한 청년대중들이 사회적 고향으로 삼았던 그 광주는 어디쯤인가.

광주에서 만난 누구도 그 실체가 민주당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당에 대한 의사결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온 게 사실이다. 정치의식을 관장하는 뇌에서 일어난 정보가 손가락 끝으로 전달돼 기표하는 사이에 왜곡이 일어나는 것일까. 필시 그만큼 볼모화돼 있는 것일 게다.

전남도청 앞, 5월 관련 단체의 혈투

스물아홉 돌을 맞은 5월을 달구고 있는 화제는 터파기를 하다 멈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설립을 둘러싼 갈등이다. 설계대로라면 도청 뒤켠에 들어서는 이 건물이 항쟁의 핵심적 상징인 옛 전남도청을 상당 부분 허물고 문을 내야 하는 터다.

“자꾸 (철거할 곳이 전남도청) 별관이라고 하는데 허물려고 하는 곳은 증축 부분이다. 본관과 통로가 연결돼 있어서 항쟁 마지막 새벽 시민군들이 이곳으로 몰려 2층 화장실에서 시신이 다수 발견되었다. 망월동 묘지와 상무대 영창을 새로 바꾸고 나니 좋은가. 도청과 분수대만은 손대면 안 된다.”

칠순 가까운 유족회 정춘식 사무총장이 갈라진 목소리로 이것만은 꼭 알려달라고 했다.

헐어내기로 되어 있는 5층 도청 건물 두 곳을 58m에 이르는 검은 비닐천이 덮고 있었다. 5·18 관련 3개 단체는 11개월 전부터 도청을 지켜야 한다고 농성을 벌여왔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조성사업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며 2월에 떠났던 구속부상자회가 농성장에 다시 들어와 유족회와 부상자동지회를 끌어내겠다고 한 건 지난 5월10일이다. 갈등은 심각한 양상이다. 며칠 전에는 참여연대를 비롯한 17개 시민단체들이 이곳에서 원형 보존을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공사를 정상적으로 진행하지 못하면 머잖아 예산을 거두어들이게 될 것이라고 을러대고 있다. 문화부 산하 아시아문화중심도시추진단 쪽에서는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것이고, 5·18 기념행사 뒤 바로 철거 집행을 밀어붙이겠다고 경고하는 실정이다.

5월이 광주에, 광주가 5월에 상처를 입히는 동안 무등산은 필경 더 낮아지고, 더 가파르게 기울고 있을 게다.

“광주시장은 물론 국회의원들도 붙잡고 통사정을 해봤다. 이러다가 광주가 큰일나는 수가 있다. 함께 해결할 길을 찾아봐달라고 숫제 읍소를 했다.”

5·18기념재단 윤광장 이사장은 올해 5월에는 부끄러워 하늘도 쳐다보지 못했다고 한사코 대화마저 마다했다. 80년 항쟁 당시 교사 신분으로 진압군에 끌려갔던 그는 광주 망명객으로 널리 알려진 동생 윤한봉을 이태 전 저 세상으로 먼저 보냈다.

» 10여년 전 새로 단장한 망월동 묘역을 학생들 무리가 들어와 채웠다. 5월을 지키는 사람은 이들일 터이다.

“광주특별법부터 잘 만들어야 했다. 정치인이란 이럴 때 정부와 시민 사이를 조정하고 지혜를 찾도록 해줘야 하는 법인데…. 민주당은 여기서는 오래도록 집권세력 아닌가.”

선 굵은 눈썹 위로 머리칼이 곤두서 있는 그가 피곤해 보였다.

광주는 앓고 있었고, 그들이 기대기에는 정부도 민주당도 너무 멀리 있었다.

29년 전 오늘 연단 삼아 올라 계엄군을 물리치고 민주화를 외치던 도청 앞 분수대에서는 무심히 물이 솟구고 있었다. 밤을 새우면서 타오르던 횃불은 없었다. 80년 이후 학살과 항쟁을 기려 5월이면 전국에서 몰려든 순례자들이 때로 10만 명을 헤아리던 그 광장은 비어 있었다. 관에서 행사를 주도하기 전 5월 광주에 와본 사람이라면 오랜 발품을 팔아 메카에 가는 무슬림들의 순례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게다. 그네들에게 여비와 신심이 필요했다면 광주로 오는 길은 경찰 감시를 뚫어야 했다는 점에서 외려 더 고난에 찼다고 해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순례자들은 방이 없어서 차디찬 대학 강당 시멘트 바닥에 기껍게 몸을 뉘곤 했다. 광주는 부채이자 교과서이고 미래였던 까닭이다. 그들이 이르려 한 정점이 도청이었다.

교통관제탑 꼭대기, 해고 노동자들

검은 비닐막 너머로 금남로를 바라보면서 엎디어 있는 옛 도청에서 만난 늦은 광주 순례자 미국인 조지 카치아피카스(전남대 교환교수)는 낙관적이었다.

“광주 사람들은 항쟁을 통해 경쟁에서 협동으로, 복종에서 저항으로 나아갔다. 나는 이를 ‘에로스 효과’라고 불러왔고, 광주를 파리코뮌과 비교한 논문을 쓴 적이 있다. 유럽의 68혁명은 애국에서 국제주의로 발전해갔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힘은 위대해 발생과 절차, 의식 따위를 다 새롭게 구성한다. 지금 갈등도 크게 봐 이와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

그는 계기에 따른 민중의 질적 변화를 유쾌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도청 바로 앞 큰길 모퉁이에는 로케트전기 해고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들 중 두 사람은 하늘로 쏘아 올라가기라도 할 듯 족히 30m가 넘는 올연한 교통관제탑 꼭대기에 둥지를 튼 채 65일째를 나고 있었다. 근육경련제를 먹고 파스를 붙인 채 어른용 기저귀와 페트병에 일을 보면서 그들은 5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광주항쟁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운 이들은 없는 사람들이었다. 허공에 매달려 생각해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노동자 처지가 근본적으로 달라진 건 없잖나 싶어 서글프다. 그래도 5월을 믿는다. 광주 시민들이 우리를 버리지 않을 줄 안다.”

30m를 두고 손전화를 타고 들리는 노동자 유제희씨 목소리는 힘이 넘쳤다. 비정규직을 없애자는 주장을 한 죄로 쫓겨난 이들을 새로 직원을 뽑을 때 우선 채용하기로 한 약속을 회사 쪽이 지켜달라는 절박한 요청은 5월의 몫으로 남아 있었다.

그렇다. 오래도록 5월 광주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5월이 열어젖힌 하늘을 그들은 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29년 전 광주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의 5월이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정치나 사회운동이 광주, 호남, 5월을 팔아 얻은 기득권을 헌 옷처럼 벗어버리고 역사의 매판자에서 새 길로 떨쳐나서지 못한다면 무등산은 더 낮아지고 말 것이다.

망월동, 기득권 돛대가 갈피를 잃은 것일 뿐

“몇 년 전 대통령이 왔을 때 학생들이 길을 막은 뒤로, 5·18 행사에 높은 사람이 오는지라 경찰이 포위하듯 길을 막고 있다. 비표 없이는 들어갈 수도 없다. 사람들 발길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꽃 팔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흔히들 망월동 구묘역이라 부르는 들머리에서 오월꽃집을 하는 아주머니는 쓰게 웃었다. 처음 시민이 몸으로 낸 참배의 길이 권력 통제 아래 들어갔으니 신명이 줄어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10여 년 전 새로 단장한 묘역으로 익산북중·광주금구중 학생들 무리를 이어 유치원 아이들 100여 명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그네들이 노란 모자를 벗고 묵념을 올렸다. 순간 망월 묘역이 환해졌다.

“나누고 양보하는 일을 배우지 않고 좋은 친구를 얻을 수 있겠는가. 5·18에는 나이를 떠나서 배울 게 들어 있다. 돌아가서 아이들에게 망월 묘역에 온 까닭을 찬찬히 일러줄 참이다.”

차점숙 원감(수완생태어린이집)이 설명을 하는 동안 사레지오수녀회 예비수녀들이 계단을 밟고 조용히 제단 앞으로 올라왔다.

5월을 지키는 사람들은 이들일 터이다. 이들이 있는 한 산이 더 낮아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란 믿음이 들었다. 민심이 떠도는 게 아니라 기득권의 돛대가 갈피를 잃고 있을 뿐인 것이다.

산의 부성이 강조되는 시대는 민중에게 신산스런 싸움을 요구하는 법이다. 언젠가 모성 어린 정치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무등산이 남도의 어머니 산일 수 있을 터다.

길을 돌아 나오자니 산이 문득 굽은 등을 펴고 몸을 일으키는 듯했다.

하안거에 든 지선 스님

“역사적 구체성을 갖고 상생 길을 찾으라”

5월9일부터 하안거에 든 지선 스님과 어렵게 마주 앉았다. 중병 뒤라서 수척했지만 생기 넘치는 담화는 여전했다. 인적 드문 깊은 절집 용흥사(전남 담양)에서 밤늦도록 이어진 대화에는 박광서 교수(전남대)가 동석했다. 백양사 주지인 지선 스님은 1987년 6월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를 맡는 등 80년 광주항쟁 이후 한국 불교의 실천적 방향을 제시해왔다.

» 지선 스님
-5월 광주는 오늘 어떤 의미인가.

=싸울 때는 다들 목숨도 버릴 수 있는 대동정신을 알았다. 사상·주장·이해관계를 넘어 생사의 기로에서 거룩한 희생을 기꺼이 마다하지 않았다. 지난해 28주년 5월 행사를 맡아 보면서 5월이 이해에 따라 분열돼 있음을 절감했다. 행사를 치를 수나 있겠느냐고 할 정도였다. 내게는 늘 어려울 때만 일을 떠민다. (웃음)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설립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5월 초 산을 내려가 몇 마디를 했다. 먼저 5월 관련 단체들을 꾸중했다. 이해관계에 따른 분열과 다툼은 광주 사람들마저 외면하게 할 것이다. 광주를 넘어 다른 사건들도 잘 풀리도록 여러분이 나서야 한다. 제주 4·3, 마산 3·15, 79년 부마항쟁도 다 마찬가지다. 어찌 광주항쟁만이 소중하다고 할 것인가. 이들과 연대하고 서로 돕고, 여느 사람들이 우러를 수 있어야 한다. 겸양과 자숙을 하고, 봉사하는 자가 돼야 한다고 했는데, 나를 포함해 다들 서로 부끄러워했다. 29년 전에는 도청 앞마당에서 총을 맞았는데, 이제는 공사방해금지 가처분 결정이 나서 집달리와 경찰에게 끌려나갈 판이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서는 곤란하다.

-민주당은 호남에서 어떤 존재인가.

=5월 광주와 호남 지역차별이나 상처를 팔아서 정치들을 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 쓸 만한 게 없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둘 다 다를 게 없다. 단적으로 성래운 선생이 16일간 단식을 하는 등 학생과 도민이 힘을 합쳐 실질적으로 조선대를 도립대학화했는데 끝내 임사이사회 체제를 바꿔주지 않아 정권이 바뀌면서 도로 옛 재단을 중심으로 이사진이 구성되고 말았다. 이는 재산권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과 교육 주체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민주당이란 게 대저 이러하다.

-호남이란 무엇인가.

=물적 빈곤에 기초한 역사의 질곡에서 신산스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른바 호남 정서가 형성됐다. 비판적 지성은 가장 빼어난 유산이다. 지배권력은 오래도록 지역분열과 분단정책을 민중 억압 수단으로 사용해왔다. 여야를 떠나 지역을 넘어 전국정당을 만들어내고자 한다면 영남이 양보하는 게 순리다. 정치·경제·종교까지 다 쥐고 있지 않은가. 그게 세상을 이롭게 할 것이라 믿는다.

-MB 정부의 분단관리 정책을 평가한다면.

=지금까지는 자살 행위였다. MB는 자신을 기르고 가르친 정주영 회장을 진짜로 존경하고 닮아야 한다. 그가 소떼를 몰고 방북한 까닭을 깊이 되새겨봐야 한다. 덧붙여 통일이 담보되지 않는 민주화 없고, 민주화가 담보되지 않는 통일이란 애초부터 허구다. 프랑스에 이런 말이 있다더라. ‘독일, 좋은 나라지. 두 개면 더 좋고.’ 이 정권에 꼭 들려주고 싶은 대목이다.

-산 아래를 향해 덕담을 해달라.

=사람살이란 애초부터 조건이 강제된 것이다. 따라서 상생은 필연이다. 밥이든 쌀이든 말이든 역사적 구체성을 갖고 상생할 길을 찾아야 한다.

광주 연작 판화가 홍성담

“역사적 책임 안 진 민주당은 유죄”

판화 연작 <새벽>을 통해 5월 항쟁 직후 광주를 바로 형상화해냈던 홍성담 화가는 광주의 위기는 ‘제사’에 있다고 거듭 말했다. 유족 중심의 ‘5월’을 시민 중심으로 옮겨와야 한다는 뜻이다.

» 판화가 홍성담
-광주항쟁을 형상화한 대표적인 작가다. 29주년을 맞은 소회가 어떤가.

=광주는 내 청춘 자체이자 자긍심이다. 29주년을 맞은 지금 씁쓸함을 못내 지우기 어렵다. 광주에서 일어나는 일도 그렇고, 인권과 민주주의가 80년대로 퇴행하는 걸 보면서 5월 광주를 더 자주 떠올리곤 한다. 악몽도 꾼다.

-광주의 형상화가 지속되고 있다고 보는가. 광주 비엔날레는 5월 정신을 잇고 있는가.

=5월 핏값으로 탄생한 비엔날레는 처음부터 민중과 유리돼 있었다. 그저 일반 미술인들의 잔치이자 유럽 비엔날레 흉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광주 내부의 먹이사슬이기도 하다. 나도 참여한 적이 있어서 자괴감이 크다. 인권·평화·반전 등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야만적 행위에 대해 창조적 형상언어로 발언할 수 있는 장이 돼야 한다. 바로 5월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일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설립 문제로 5월 단체들이 갈등을 하고 있는데.

=도청은 마땅히 보존돼야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분열하지 않는 일이다. 하물며 거기서 총에 맞아 죽기도 했는데, 이 갈등쯤이야 뛰어넘어야 한다. 내부의 적도 물리쳐야 진짜 5월 정신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기심 말이다.

-얼마 전 보궐(지역의회) 선거에서 민노당 후보가 광주와 장흥에서 당선했다. 광주·전남의 민심은 진보적인 것인가. 지역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가.

=굳이 여타 지역에 비교할 것 없이 진보적인 정치적 의사를 갖고 있음에도 최악만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민주당을 선택해왔다. 당선 가능성, 견제세력 따위의 논리가 그것이다. 그 때문에 광주·전남 사람들은 오래도록 이중성에 시달려야 했다. 지역주의라는 폄하도 뒤집어써야 했다. 지역 대중의 정치 수준에 걸맞은 정치세력이 출현해야 하는 게 마땅하다고 본다. 민노당 후보 당선은 변화를 갈급하게 요청하고 있는 민심을 말한다. 민주당이라는 정치세력은 역사적 책임을 온전히 져본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유죄다.

-근래 어떤 작업을 하나.

=일본 제국주의 본질을 알리려 해온 야스쿠니신사 작업에 이어 용산 참사에 대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설을 며칠 앞둔 새벽에 생명을 불태워버리는 권력이 있는 한 5월은 계속된다. 이것은 광주와 다를 바 없는 학살이다. 수난이 새로 시작되고 있어서 끔찍하고 고통스럽지만 두렵지 않다. 우리는 이 산을 넘어갈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광주가 남긴 자산이다.

광주=글 서해성 소설가·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연합, 한겨레 자료


by kkuli | 2009/05/22 16:11 | 3.뉴스.. | 트랙백 | 덧글(0)

너에게 띄우는 글..





사랑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진정한 친구이고 싶다.
다정한 친구이기보다는 진실이고 싶다.
내가 너에게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다 하더라도
너는 나에게 만남의 의미를 전해 주었다.
순간의 지나가는 우연이기보다는 영원한 친구로 남고 싶었다.

언젠가는 헤어져야할 너와 나이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친구이고 싶다.
모든 만남이 그러하듯
너와 나의 만남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진실로 너를 만나고 싶다.
그래, 이제 더 나이기보다는 우리이고 싶었다.
우리는 아름다운 현실을 언제까지 변치 않는 마음으로 접어두자.
비는 싫지만 소나기는 좋다.
인간은 싫지만 너만은 좋다.
내가 새라면 너에게 하늘을 주고
내가 꽃이라면 너에게 향기를 주겠지만
나는 인간이기에 너에게 사랑을 준다.


이해인..




by kkuli | 2009/05/22 15:18 | 3.기억되는 시.. | 트랙백 | 덧글(0)

기억 속 상처를 소독한다..

 




기억의 간격 夏 Ⅲ

[아시아경제신문 박소연 기자]갤러리현대는 얼룩과 번짐을 이용해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해 온 동양화가 서윤희의 개인전 '기억의 간격'展을 연다.

서윤희는 다양한 약재, 차 등을 우려낸 물로 한지를 찌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해 나타나는 얼룩을 통해 삶의 흔적을 표현한다.

작가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쌓아온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 극도의 인내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는 과정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 위에 얹어 놓는다.

작가가 선택한 약재나 차 등의 한국적인 소재는, 기억에 묻혀있는 상처를 소독하고,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고충환 미술평론가는 서 작가의 그림에 대해 "그림의 표면 위로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을 모두다 불러내고 되새김질함으로써 자신의 상처와 대면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일종의 주술적 행위"라 표현했다. 오는 26일부터 다음달 14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현대.

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
<ⓒ아시아경제 & 스투닷컴(stoo.com)이 만드는 온오프라인 연예뉴스>


by kkuli | 2009/05/22 14:41 | 5.문화.. | 트랙백 | 덧글(0)

Renoir..





르누아르는 어떤 작가인가

도자기 공장에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화공으로 첫 발을 내딛은 르누아르는 그 이전의 어떤 화가도 이룬 적이 없는 유쾌하고도 아름다운 작품을 무수히 남기며 인상주의의 대가로 자리매김한다. 19세기 말 경 파리인들에게 사랑 받던 무도회장을 그린 <물랭 드 라 갈레트>(1876)는 나뭇가지 사이로 드리워진 초여름 햇빛을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젊은 남녀들의 모습과 함께 화폭에 담아내며 르누아르를 인상주의 대가로서 그 중심에 서게 한다.

전체 글 보기

전시 관람 포인트

이번 전시는 르누아르 예술의 총체적인 이해가 쉽도록 연대기적 구성이 반영된 8개의 테마로 꾸며진다. 삶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동시대를 살았던 아름다운 여인, 귀여운 아이들, 웃고 있는 사람들을 현란한 색채로 표현한 인물화의 구성인 제 1부 <<일상의 행복>>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시작으로, 제 2부 <<가족의 초상>>, 제 3부 <<여성의 이미지>>가 소개되며, 고전주의적 가르침을 통해 관능적이고 풍만한 여인들의 모습을 그린 제 4부 <<욕녀(浴女)와 누드>> 를 통해 르누아르 예술의 완성미를 엿볼 수 있다. 르누아르의 화상이었던 뒤랑-뤼엘과 베르넴-젼느, 볼라르와의 관계를 살펴보는 <<르누아르와 그의 화상들>>이 제 5부에서 소개되며, 인상주의 태동의 주된 모티브였던 자연은 다양한 <<풍경화와 정물화>>(제 6부)을 통해 소개되고, 르누아르만의 독특한 필치는 제 7부 <<르누아르의 종이작품>>에서 만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르누아르의 모습을 화폭에 즐겨 담았던 알베르 앙드레의 작품(제 8부 <<알베르 앙드레가 본 르누아르>>)도 함께 전시된다.

이러한 테마를 따라 작품을 관람하면, 르누아르가 그의 화폭에 담아낸 색채 하나 하나를 통해 생에 대한 낙관과 긍정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르누아르 작품

전시설명 다운받기 온라인 전시보기

르누아르 예술의 최고 걸작품을 만나는 서울 전시

르누아르 서울 전시는 1985년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회고전 이후 전시 작품의 질과 양적인 면에서 르누아르 단일 전시사상 최대 규모이다. 120여 점에 달하는 르누아르의 작품은 인상파의 보고로 알려진 오르세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 워싱턴 국립미술관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 소장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이루어졌다.

이번 전시를 통해 국내 첫 선을 보이는 작품들은 르누아르 예술의 걸작품으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상주의 시기의 대표작품 <시골 무도회>(1883), <그네>(1876), <햇살 속의 누드>(1875-1876)를 비롯한 <피아노 치는 소녀들>(1892), <광대복장을 한 코코>(1909) 등 르누아르 작품의 시기별 대작들로, 인상파 미술의 화려한 색채화가 르누아르 예술의 진수를 맛보기에 손색이 없는 전시이다.

Exhibition info

르누아르 포스터
행복을 그린 화가 : 르누아르 Renoir : Promise of Happiness
전시장소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기간
2009년 5월 28일 ~ 9월 13일
전시작품
118점 (유화 및 종이 작품)
관람시간
평일 / 오전 10시~21시
주말 및 공휴일 / 오전 10시~20시 (월요일 휴관)

by kkuli | 2009/05/22 09:28 | 5.문화.. | 트랙백 | 덧글(0)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슬픔이 그대의 삶으로 밀려와 마음을 흔들때..

소중한 것들을 쓸어가 버릴때면..

그대 가슴에 대고 가만히 말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행운이 그대에게 미소 짖고 환희와 기쁨이 가득할때..

근심 없는 날들이 스쳐갈 때면..

세속적인 것들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이 진실을 조용히 가슴에 새기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by kkuli | 2009/05/22 08:52 | 2.post-it.. | 트랙백 | 덧글(0)

그대와 술한잔 하고픈 날..





이렇게 밤 깊은 시간에
깨어 있을 줄 몰랐습니다
그냥 좋은 인연으로 만나서
서로에게 부담없는 친구가 되자고
시작은 그러했습니다

고독의 아픔이 어떤 것인지
오래전에 알고서도
영혼 깊은 곳에 심은 그대의 뿌리가
조금씩 내 몸을 가르고 있는데
운명처럼 다가온 이 느낌으로
다시 내 운명 안에 그대를 담습니다

이제

그대에 대한 사랑 한숨 호흡 고르고
잠시 눈감아 보렵니다
당신의 글 속에서도
당신의 몇말 속에서도
위해주는 마음
그리워하는 마음
다 헤아릴 수 있습니다

마치 소금쟁이가 물위를 걷듯
말 한마디 표현에도
조심조심 다가오는 당신

언제나 변함없는 미소로
늘 그자리에서
나를 지켜봐 주리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처음에 선뜻 다가서지 못한 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대를 그리워하고 그대가 보고 싶어
때로는 힘겨울 날도 오겠지만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같이 느끼는 것만으로도
행복임을 그대는 아는지?

오늘도 그대를 생각하며
불어오는 바람결에 내 마음 실어
그리움의 향기 띄웁니다
이제 그대를 위해
마음을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머지않아 가득하게 차오를
그대를 가슴에 담으려면
지금 꼭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살아감이 그러하듯
그대 이제
내 속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바람이 제법 싸늘합니다
맘 한켠이 그대빛깔로 가득해지고
하늘가득 그대얼굴로 수놓아질때
꽃들의 향기가득실어넣고
자연의 풍요로운 가득담아서

당신과 술한잔 하고싶습니다

그리움이 파도되어 밀려들면
당신도 마술에 걸린듯
내 그리움으로 하늘한번 바라봐 주실꺼죠?

늦은 저녁
실바람이 귓전을 스칠때
잃어버렸던눈물 다시 찾게 되는 날

우리 살아가는 아름다움에 취하도록
그리움에 그리움을 타서
당신과 함께

술 한잔 하고 싶습니다..



by kkuli | 2009/05/22 08:51 | 3.기억되는 시.. | 트랙백 | 덧글(0)

부자란..




부자란 집이나 물건을 남보다 많이 차지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불필요한 것들을 갖지 않고 마음이 물건에 얽매이지 않아 홀가분하게 사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부자라할 수 있다.
한밤중 잠에서 깨어나 별빛처럼 또렷한 의식을 가지고 그날그날 삶의 자취를 낱낱이 살피고,
자기 중심으로 생각 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세상의 눈으로 자신을 비춰 보는,
이런 일들을 통해 노년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다.


노년의 아름다움이란 모든 일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남에게 양보할 수 있는 너그러움에 있음을 잊지 말 일이다..

p.16~17..

by kkuli | 2009/05/22 08:43 | 2.아름다운 마무리.. | 트랙백 | 덧글(0)

희망을 가지고..




 
스코트는 자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L. Stevenson)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곤 했다.
 
"희망을 가지고 여행하는것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나으며, 가장 위대한 성공은 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스코트의 생각은...
"만약 당신의 삶이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면, 당신은 더 높이 올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 내가 성취해야 할 것이 바로 실패였다.]
 
군중보다 한 발짝 앞으로 나가면 지도자가 된다.
두 발짝 앞서면 방해꾼이 된다.
세 발짝 앞서 나가면 미친 사람으로 의심을 받는다.
자신의 가치 기준을 세우고, 스스로 판단한 데 따른 결과를 참는 사람들은 그런 자기 선택에 책임을 진다."
 
이 글을 썼을때 스코트는 34세였다.

p.29..



by kkuli | 2009/05/22 08:21 | 3.아름다운삶.. | 트랙백 | 덧글(0)

사람은 대중의 생활 습관,도덕 기준을..




40세도 채 안 되었는데 다시는 미국의 학교에서는 가르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시기의 생활에 대해 스코트는 다음과 같이 쓰라린 기록을 남기고 있다.

 

"사람은 대중의 생활 습관,도덕 기준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규범에 따라 살고 그것을 지키면서 그에 반대되는 사회에 대항하여 거슬러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무저항의 길을 따를 것인가?

지난 교수 생활 11년은 최고의 시간들이었으며, 가장 행복하고 값진 순간들이었다.

그 시간들은 인간적인 친교와 아울러 든든한 연대의 끈을 맺게 해준 나날이었다.

돌이켜보면 너무나 만족스러운 시간들이어서 나는 고통스럽게 생각하지 않으며 조금의 후회도 없다.

그러나 내가 무엇보다 더 잘 이해하고 그래서 더 사랑한 그 세계의 문은 닫혔으며, 영원히 열리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1922년 뉴욕 콜 지에 기고한 글에서 스코트는 이렇게 썼다.

 

"이상적인 삶은 어떤 댓가를 치르기 마련이다.

그 이상이 관례에서 멀어질수록, 더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당신의 이상이 정신적으로 활발하게 움직이며, 정직하고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면, 그 이상을 이루기 위해 의식주마저 희생할 수 있다"

 

뉴욕 콜 지의 또다른 기고문에서는 이렇게 썼다.

 

"혼자 떨어져 사는 은둔자가 반드시 순교자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는 삶의 이런 방식과 저런 방식 중에서 선택한 삶의 방식, 그 자신의 길을 따라가면서 거기에서 통행료를 내는 것이다." 

p.25..




by kkuli | 2009/05/22 08:18 | 3.아름다운삶.. | 트랙백 | 덧글(0)

5월의 동물원..

예매유의사항

by kkuli | 2009/05/22 08:15 | 4.공연.. | 트랙백 | 덧글(0)

마이클 고반 LA 카운티미술관장..




마이클 고반 LA 카운티미술관장 "한국 미술의 위상 곧 달라질 겁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이었어요. 제가 이때까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웠어요. 동짓날 태양이 비치면 그 빛이 부처의 이마 한가운데를 비추도록 설계됐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우주의 신비라고나 할까. 차마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더군요."

21일 오전 김포공항 인근의 한 호텔, 방금 경주에서 날아온 짙은 갈색 머리의
미국사내가 석굴암에 대한 찬탄을 늘어놓았다. 미국 서부의 대표적인 미술관인 LA 카운티미술관(LACMA)의 사령탑 마이클 고반(Govan·46) 관장이 22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 참석차 방한했다. 한국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 그는 "조선 백자(白磁)와 같은 단아하고 정갈한 형태가 한국 문화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올 하반기 미국 서부 미술계의 화두는 단연 '한국'이다. 내달 28일 LACMA에서 '당신의 밝은 미래(Your Bright Future)'라는 제목의 한국 현대작가 12인전이 개막하고, 올 9월에는 해외 미술관 중 최대 규모의 한국 미술품(1300여점)을 소장하고 있는 LACMA의 한국실이 3년간의 리노베이션을 마치고 재개관하기 때문이다. 전통과 현대를 아우른 이 '한국 열풍'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고반 관장은 "그동안 한국 미술은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국제무대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면서 "이번 여름과 가을에 걸친 두 번의 쇼(show)로 한국 미술의 위상이 달라질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LA 카운티미술관의 대대적인 혁신을 주도하고 있는 마이클 고반 관장은“미술관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여는 실마리”라고 말했다. 무엇보다‘창의적인 것’을 중시하는 고 반 관장의 취미는 비행기 조종이다./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혁신(transformation)'을 캠페인으로 내건 LACMA의 '구원 투수'로 지난 2006년 봄 영입된 고반 관장의 이러한 자신감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부관장을 역임해 화제가 됐던 그는 미술관 큐레이터로 잔뼈가 굵은 '현장형 전문가'다.

그는 1994년부터 12년간 비영리재단인 뉴욕 디아 아트재단 대표로 재직하면서 허드슨 강변의 인쇄공장을 개조해 2만2000㎡(약 6744평) 규모의 디아비콘(Dia:Beacon) 미술관을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실현했다. 세계적인 건축가 렌조 피아노(Piano)가 설계해 지난해 2월 LACMA에 문을 연 5300㎡(약 1600평) 규모의 새 현대미술관도 성공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 미술계의 주목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이 '아트 CEO'는 그러나 "나는 한번도 미술관 경영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했다.

워싱턴 DC 출신인 고반 관장은 원래 개념미술가를 꿈꾸던 예술가 지망생이었다. 매사추세츠주의 윌리엄스 칼리지에서 미술과 미술사를 공부하던 그는 학교 미술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당시 관장으로 있던 토마스 크렌스(Krens) 전(前) 구겐하임 관장의 눈에 띄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샌디에이고의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크렌스 관장님이 '같이 일해보자'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공부'를 접고 '일'을 택했지요."

이루지 못한 '예술가의 꿈'에 대한 아쉬움은 없을까. 그는 "창의적인 사람들을 계속 만날 수 있어서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다. "'예술가'란 창의적인 사람들 중 가장 정교한 부류지요. 저는 그 못지않게 '창의적인 방향'으로 '혁신'을 주도하는 사람들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대중에게 아름다운 것들을 창의적인 형태를 통해 보여주는 것, 그게 제 직업이거든요."




by kkuli | 2009/05/22 08:05 | 3.뉴스.. | 트랙백 | 덧글(0)

지친 날개..

..
..
한번 어긋난 방향을바로 잡기란 이리도 힘든 것일까..
..
어떻게 이 삶의 항로를 바꿔 놓아야 하는 것인지..
끝없는 추락으로 지쳐만 가는 자신의 영혼..
언제쯤이면 이 지친 날개를 쉬게 해줄수 있을까..
..
..
아침에 태양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렇게 또다른 하루가..
..



by kkuli | 2009/05/22 08:02 | 1.하루.. | 트랙백 | 덧글(0)

개혁자..




대다수 사람들은 창조와 개혁에대해 언제나 조심스럽고 망설이며, 현상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개혁자,
 
이미 알려진 길을 벗어나 가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일 수밖에 없고 끊임없는 반대와 비난, 질시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창조적 사고와 행위에 따르는 희열에 대해 그가 치러야 하는 대가의 일부이다.

스코트는 늘 헌신과 봉사, 책임감있는 삶을 살려고 했고 자기를 과시하거나 크게 드러내 보이는 생활은 피해왔기
 
때문에, 해직 되었다고 해서 심한 혼란을 겪지는 않았다.

p.26..


by kkuli | 2009/05/20 13:16 | 3.아름다운삶.. | 트랙백 | 덧글(0)

좌우명..




스코트의 자료철 속에 있는 종이 쪽지에 다음과 같은 연필로 쓴 메모가 두 개 있다.

 

(1908년10월20일)

 

"속된 삶 -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성공하고 유명해진다."
"양심을 지키는 삶 - 소명에 따라 행동하고 두려움이 없으며 정의롭게 된다. 성공은 부러움의 대상이되고 유명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 반면, 정의로움은 영원한 반석이 된다."

대중에게 널리 읽힌 [저마다의것 Everybody's]에서 따온 이 구절은 그 사람의 좌우명 가운데 하나였던 것처럼 보이는데, 초기 수십 년 동안 좌우명 맨 앞머리에 되풀이해서 쓰였다.

 

1911년 자기 앞으로 쓴 비슷한 내용의 이런 기록도 있다.

"네가 일을 시작할 때 다음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곧 사람은 경제적인 상품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중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면 현실 문제는 이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느냐이다."

 

다음은 같은 시기에 쓴 좌우명이다.

"간소하고 질서있는 생활을 할것.

미리 계획을 세울 것.

일관성을 유지할 것.

꼭 필요하지 않은 일을 멀리할 것.

그날 그날 자연과 사람 사이의 가치있는 만남을 이루어가고,

노동으로 생계를 세울 것.

자료를 모으고 체계를 세울 것.

연구에 온 힘을 쏟고 방향성을 지킬 것.

쓰고 강연하며 가르칠 것.

계급투쟁 운동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할 것.

계속해서 배우고 익혀 점차 통일되고, 원만하며, 균형잡힌 인격체를 완성할것."

p.27..


by kkuli | 2009/05/20 13:14 | 3.아름다운삶.. | 트랙백 | 덧글(0)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스콧 니어링은 1883년 미국 한 탄광도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며 자본의 분배문제를 깊이 연구했는데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앞장서다 해직되었다. 그후 톨레도 대학에서 근무했으나 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주장하다 또다시 해직되었다.

1917년 반전 논문을 발표하여 스파이 혐의로 기소되어 1919년 연방법정에 피고로 섰지만, 배심원들의 30시간에 걸친 긴 숙의 끝에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사회로부터 위험분자, 과격분자로 몰려 소외를 당했다.

생의 후반기로 접어든 니어링은 스무 살 연하의 매력적인 여성 헬렌 노드를 만나 새로은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처음에는 버몬트에서 그리고 후에는 메인에서 그들은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적인 생활을 했고 겨울에 농장이 얼어붙어 농사를 지을 수 없으면 여행을 떠나고 강연을 하고 저술을 하며 지냈다.

1983년 8월 24일 100세가 되던 해, 스콧 니어링은 부인 헬렌 니어링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1백 년의 시간을 통해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으로 의미있고 충만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준 사람이었다.

by kkuli | 2009/05/20 13:07 | 3.아름다운삶.. | 트랙백 | 덧글(0)

11월의 숲은..




11월의 숲은 성글다.
물든 잎들이 지고
가지와 줄기가 듬성듬성
제 모습을 드러낸다.
뜰에 찬 그늘이 내리는 이 무렵이
겉으로는 좀 쓸쓸한 듯하지만
안으로는 중심이 잡히는 아늑하고 따뜻한 계절이다.
가을 하늘처럼 투명하고
한가로움과 고요로 차분해진 산중은
그 어느 때보다 산중답다
숲은 안식과 치유의 장소
이 투명함과 한가로움과 고요가
안식과 치유의 기능을 한다.

p.6..


by kkuli | 2009/05/20 12:53 | 2.아름다운 마무리.. | 트랙백 | 덧글(0)

친구여, 뚜렷한 근거가 떠오르거든..

 


"친구여, 뚜렷한 근거가 떠오르거든, 어리석음이 더 커져서 행동을 방해하기전에,

그대를 묶어 놓고 있는 것들로부터 멀어져라.

시골이라면 그대와 잘 어울릴 것이다.

나무와 물에게 그대가 필요하게 하라.

곡식이 영그는 땅에 그대의 보금자리를 만들면, 땅과 풀이 그대를 먹여 살리리..

벌판의 바람이 그대를 둘러싸리..

그대를 시기하는 사람들의 질투를 마음에 두지 말고 흘러가게 하라.

 

신에게 감사하고 축복하는 마음을 가질것. 그리고 자네, 이제 앉아서 쉬게나."

투서 (Thomas Tusser).

<좋은 농부가 되는 오백 가지 방법 Five Hundred Pointes of Good Husbandrie>.1573


by kkuli | 2009/05/18 20:10 | 2.post-it.. | 트랙백 | 덧글(0)

죽은 자의 혼이여..

..
..

죽은 자의 혼이여, 내 몸에 붙어라!

내 어깨에 올라타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나를 붙잡아라..

그리고 함께 모두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너희들이 태어난 자랑스러운 조국으로..

너희들이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는 곳으로..

이제 너희들을 아프게 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이 두 팔로 힘껏 너희들을 안아보고 싶다..

눈물도 슬픔도 내 손으로 닦아 내리라..

떠도는 슬픈 혼들이여, 나를 잡아라!

내 몸에 올라타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같이 가야 한다..

죽어서도 그리던 그 곳으로..

이제 너희들을 슬프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너희들의 뿌리이자 조상의 땅인, 그곳으로..

이제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

..

by kkuli | 2009/05/15 14:50 | 1.도키나와 코코로.. | 트랙백 | 덧글(0)

한 침대에서 잔다는것은..

 

 

한 침대에서 잔다는 것은 섹스만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한 침대에서 밤에 같이 잠이 든다는 것은
그 사람의 코고는 소리..

이불을 내젓는 습성..

이가는 소리..
단내나는 입등..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 외에도,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게 볼 수 있다는 뜻이다.

화장안한 맨얼굴을 예쁘게 볼 수 있다는 뜻이며
로션 안바른 얼굴을 멋있게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팔베게에 묻혀 눈을 떳을 때
아침의 당신의 모습은 볼 만 하리라.
눈꼽이 끼고, 머리는 떴으며, 침흘린 자국이 있을 것이다.
또한, 입에서는 단내가 날 것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단내나는 입에 키스를 하고
눈꼽을 손으로 떼어 주며
떠 있는 까치집의 머리를 손으로 빗겨줄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신이 함께 그와 또는 그녀와 잔다...
처음에 당신은 그의 팔베게 안에,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자겠지만.

한참 깊은 잠 중에서는 당신들은 등을 돌리고 잘 지도 모른다.
왜냐면, 깊은 잠속에서 당신의 잠 버릇은 여지 없이 다 나오기 때문이다.
이를 갈기도 하고.
눈을 뜨고 자기도 하며.
배를 벅벅 긁거나.
잠꼬대를 한다거나.
잠결에 울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당신이 함께 잔다면
아침에 눈을 뜨자 마자. 단내나는 입으로 키스를 할 수 있으며
옷을 충분히 입지 않았다면...바로 섹스가 가능할 지도 모른다.

섹스만을 하기 위한 잠자리에서와는 다르게
별도의 복잡한 절차와 교태와 암묵적인 합의가 필요 없다는 뜻이다.

그런...
한 침대에서 잔다는 것은...
매일 같이 잘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매일 같이 섹스를 하는 사이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집이 아닌 곳에서, 애인과 섹스를 할 때에는
우리는..일단 그와, 그녀와 어떤 합의가 있어야 한다.

사랑한다고 믿는다고.
아니면 충분히 매력적이다라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하튼 잘 만한 사람이며 사이라는 것을
서로..합의하에 이루어진다.

몇시에 호텔에.또는 여관에 들어가서 몇시에 나선다는.
그런 합의가 있으며.
그 곳에 가기 전에 상대방의 귀를 만진다든지.
엉덩이를 만진다든지, 하고 싶어..라고 말을 한다든지 하는
서로의 확실히 약속된 언어적, 비언어적 합의가 있을 것이다.

그 곳에 가면...남자는 계산을 하기 위해 지갑을 열 것이고.
여자는 텔레비젼을 켜며 콘돔을 준비하라고 말을 한다.

둘은... 습관에 따라 먼저 목욕탕으로 들어가기도 하며
그냥..침대에서 일부터 벌릴 수도 있다.
그렇게 한바탕의 폭풍이 지나가면...
잠시 누워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기도 하며..
여자는 눈썹이 지워지지 않았나 화장을 고칠 것이며
남자는 자신이 여자를 만족시켰나 다시 되씹어 볼 것이다.

그런 후 다시 한 번의 폭풍이 있을 것이다.
시간에 쫓긴다거나 정력이 형편없다면 그렇지 않겠지만.
그런 후..
다시 목욕탕에 들어가 씻고.
그 곳에 발을 디딜 때와 다름없는 모습을 갖추기 위해
여자는 화장을 하고, 머리를 빗으며
남자는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을 것이다.

그러면..섹스뒤의 느낌은 어떨까.

사랑하는 사이라면, 그런 최면에 걸렸다면, 좋을 것이고.
여자가 집에 늦었다면..여자는 불안할 것이며..
새벽께라면...남자는 더 머무르고 싶을 것이다...
가임기간이라면 둘 중의 하나는 불안할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기쁠 지도 모른다.
불행하다면 둘 다 불안할 것이겠지만...

그들은..
항상 꾸민 모습으로 만나며
눈꼽 낀 얼굴을 볼 수 없으며 단내나는 입술에 키스를 할 수 없다.

남자는 여자의 화장 안한 얼굴이
얼마나 큰 상상력을 요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며
여자는 남자가 얼마나 씻기 싫어하고 게으르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항상...잘 차려진 모습으로 만나며..
섹스는...그들만의 합의된 축제이다.

그러므로,
한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것은
한 침대에서 섹스를 할 수 있단 것과 다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by kkuli | 2009/05/15 14:30 | 2.post-it..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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